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알고리즘이 틀어준 영화를 아무 정보 없이 봤다가 끝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경험, 저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. 넷플릭스 오리지널 <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(The Devil All the Time, 2020)>가 딱 그랬습니다. 신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흔히들 말하지만,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믿음이 깊을수록 더 빠르게 무너집니다. 트라우마, 빗나간 신앙, 그리고 선의에서 출발한 복수가 어떻게 비극의 연쇄를 만들어내는지 — 제가 본 영화 중에서 이 구조를 이만큼 냉정하게 보여준 작품은 드물었습니다.
전쟁이 심어놓은 트라우마 — 윌러드의 신앙은 왜 광기가 됐나
일반적으로 신앙은 사람을 안정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. 저도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. 그런데 윌러드라는 인물을 보면서 그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.
윌러드는 2차 세계대전 참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입니다. 전장에서 전우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일상으로 그냥 복귀한다는 게, 솔직히 영화를 보는 내내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. 여기서 트라우마(Trauma)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. 트라우마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 사건이 인간의 심리에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. 윌러드는 이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신앙으로 봉합하려 했고, 뒷산에 직접 십자가를 세우며 매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.
문제는 아내 샬롯이 암에 걸리면서 터집니다. 윌러드의 신앙은 이 지점에서 광기와 경계가 허물어집니다. 아들이 아끼던 강아지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제가 직접 보면서도 눈을 의심했습니다. 아내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, 그 방식이 트라우마가 해소되지 않은 채 종교적 집착과 결합하면 어디까지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. 출처: 미국심리학회(APA)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을 경우 인지와 행동 전반에 걸쳐 심각한 왜곡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.
결국 샬롯은 세상을 떠나고, 윌러드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어린 아빈만 남겨집니다. 이 흐름을 보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. 상처를 덮어두는 것과 치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입니다.
신앙의 외피를 두른 자들 — 로이와 티가딘이라는 두 얼굴
신앙심이 깊다는 것과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 같은 의미인지, 이 영화는 그 질문에 아주 냉정하게 답합니다. 저는 이 부분에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가장 설득력 있다고 느꼈습니다.
먼저 로이입니다. 겉으로는 신앙에 목숨을 건 인물처럼 보이지만, 아내 헬렌을 목 찔러 살해하고 시신을 암매장한 뒤 도주합니다. 그런데 이 악인이 도주 과정에서 또 다른 연쇄살인마 칼 부부에게 희생당합니다.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선이 악을 응징하는 권선징악(勸善懲惡) 구조를 기대하게 됩니다. 권선징악이란 선한 행위를 권장하고 악한 행위를 벌한다는 의미의 서사 원칙입니다.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. 악이 또 다른 악에게 먹히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,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.
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티가딘 목사는 그 자체로 별도의 챕터가 필요한 인물입니다. 저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드릭 디고리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, 처음에는 이 배우가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게 와닿지 않았습니다. 그런데 실제로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. 티가딘은 카리스마(Charisma)를 극단적으로 악용하는 인물입니다. 카리스마란 원래 신학적으로 '신이 내린 은총'을 뜻하는 개념으로, 현대에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자기장 같은 매력을 의미합니다. 티가딘은 이 매력과 종교적 권위를 방패 삼아 신자들의 맹목적인 신뢰를 착취합니다.
영화가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선다고 제가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. 종교적 지위를 이용한 착취 구조는 현실에서도 반복되어 온 일입니다. 패틴슨의 연기는 그 섬뜩한 현실성을 정확히 구현해냈고, 제 경우엔 이 인물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.
- 로이: 신앙을 내세우지만 아내를 살해한 뒤 스스로도 다른 악인에게 희생되는 아이러니한 인물
- 티가딘: 목사라는 권위와 카리스마로 신자들의 신뢰를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인물
- 두 인물 모두 신앙의 외형을 두르고 있지만, 그 내면은 철저히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채워져 있음
잘못된 대상에게 기댄 대가 — 레노라의 인지적 취약성
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인물은 아빈도, 티가딘도 아닌 레노라였습니다.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인물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.
레노라는 살인자였던 로이와 그 피해자 헬렌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. 부모를 모두 잃고 아빈의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, 창백한 외모 때문에 또래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합니다. 그 모든 상황에서도 레노라를 버티게 해준 것은 신앙이었습니다. 그런 레노라가 기댄 상대가 하필 티가딘이었다는 게, 이 영화의 가장 잔인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.
심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인지적 취약성(Cognitive Vulnerability)이라고 부릅니다. 쉽게 말해, 심리적으로 소진되거나 극심한 상실을 경험한 상태에서는 비판적 판단 능력이 저하되어 착취적 관계에 노출되기 쉬운 취약한 심리 상태를 의미합니다. 출처: 미국정신의학회(APA)의 관련 연구에서도 심리적 고립 상태에서는 타인의 권위나 친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합니다. 레노라가 딱 그 상태였습니다.
임신 후 티가딘에게 버림받은 레노라는 깊은 수치심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. 영화는 이 장면을 신파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건조하게 보여줍니다. 그래서 오히려 더 묵직하게 남습니다. 제 경험상 이런 감정의 여운은 과장된 연출보다 절제된 묘사에서 더 오래 지속됩니다. 레노라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, 사람이 가장 취약할 때 얼마나 위험한 대상에게 손을 뻗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로 읽혔습니다.
선의로 포장된 복수의 끝 — 아빈의 총이 남긴 것
복수가 끝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, 저도 영화 초반에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.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기대를 끝까지 허락하지 않습니다.
레노라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아빈은 아버지 윌러드에게 물려받은 총을 꺼냅니다. 그리고 티가딘을 찾아가 응징합니다. 아빈의 행동은 레노라를 향한 사랑과 의리에서 출발한 것이고, 그 마음은 제가 봐도 충분히 이해됩니다. 문제는 그 선의가 낳는 결과입니다.
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빈은 연쇄살인마 칼 부부의 차에 타게 되고, 그들의 범행을 눈치채고 증거 필름을 챙겨 달아납니다. 여기서 영화는 제도적 부패(Institutional Corruption)라는 구조적 문제를 자연스럽게 끌어옵니다. 제도적 부패란 공권력이나 공공기관이 공익 대신 개인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할 때 발생하는 시스템 차원의 실패를 의미합니다. 보안관 리 보덱커는 칼 부부의 살인 증거를 발견하고도 자신의 선거와 비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증거를 은폐합니다. 이 장면에서 제가 느낀 건,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까지 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.
결국 아빈과 리 보덱커는 맞닥뜨리고, 두 사람 모두 총격전 끝에 쓰러집니다. 아빈은 다시 긴 여정을 떠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납니다. "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"는 격언이 이렇게 정확하게 들어맞는 영화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. 아빈의 복수는 옳고 그름을 떠나,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지 못했습니다. 이 결말이 찜찜하면서도 정직하다고 느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.
자주 묻는 질문
Q.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서 볼 수 있나요?
A.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2020년 9월에 공개되었습니다. 넷플릭스 구독자라면 별도 추가 비용 없이 바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. 청소년 관람불가(19세 이상 관람가) 등급이므로 플랫폼 연령 설정을 먼저 확인하시는 걸 권합니다.
Q.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실화인가요?
A. 실화는 아닙니다. 미국 작가 도널드 레이 폴록(Donald Ray Pollock)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. 다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애팔래치아 지역의 종교적 분위기와 사회 배경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재현해서, 제가 처음 볼 때는 실화 기반인 줄 착각할 정도였습니다.
Q. 로버트 패틴슨이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인가요?
A. 로버트 패틴슨은 타락한 목사 티가딘 역을 맡았습니다. 일반적으로 그의 이미지를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드릭 디고리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, 제가 직접 봤을 때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.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신자들을 착취하는 인물을 섬뜩하리만큼 설득력 있게 구현해냅니다.
Q. 스릴러 입문자에게도 추천할 만한 영화인가요?
A. 솔직히 말씀드리면, 입문용으로 첫 번째 선택지로 권하기는 어렵습니다. 폭력 묘사가 직접적이고 등장인물 대부분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구조라 심리적으로 상당히 무겁습니다. 다만 깊이 있는 인물 서사와 메시지를 선호하는 분이라면, 보고 난 뒤 며칠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임은 분명합니다.
결론
<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>는 화려한 캐스팅에 비해 속이 시원한 영화가 아닙니다. 톰 홀랜드, 로버트 패틴슨, 세바스찬 스탠, 엘리자 스캔런이 모두 나오지만, 보고 나서 가슴이 묵직하게 얹히는 쪽에 가깝습니다.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감상 직후보다 며칠이 지난 뒤에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유형인데, 이 작품이 정확히 그랬습니다.
이 영화가 결국 묻는 건 하나입니다. 삶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순간, 우리는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는가. 그 대상이 신이든, 복수든, 잘못된 사람이든 간에 —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기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 영화는 담담하게, 그리고 그래서 더 무겁게 보여줍니다. 어두운 주제가 부담스럽지 않은 분이라면, 한 번쯤 감상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.